삼성, 정상에 도달했을 때 뭘 해야 하나?

어제 삼성-애플 소송에서 삼성의 패소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삼성의 ‘맹추격자 (fast follower) 전략’이 한계에 이른 증거이자 결과물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오늘자 한겨레에서 같은 관점의 기사가 실렸더군요. (중앙일보도 비슷한 취지의 사설을 실었는데 삼성을 옹호하는 톤이 너무 강해 생략합니다.^^)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8889.html

올초 이와 관련해 <문제는 경제다>에서 제가 자세하게 쓴 적이 있습니다. 관련한 원고 부분을 소개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나라나 기업이 따라잡기 전략을 쓸 때는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더 잘 하면 된다. 이런 건 한국이 잘 해왔다. 현대는 신뢰할 수 있고, 효율적이면서도 싼 자동차시장에서 도요타를 물리쳤다. 한국의 조선산업들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남들이 앞선 궤적을 남길 때만 작동한다. 이제 선두그룹에 진입해서 따라갈 궤적이 없어졌다. 그러면 이제 남들의 성공 사례를 개선하기보다는 자신의 실패로부터 배워야 하고, 혁신에 더욱 의존해야 한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모델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게는 모범 사례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2011년 11월 12일자에 실린 ‘정상에 도달했을 때 뭘 해야 하나?’라는 기사의 일부다. 한국경제가 정상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인용한 내용의 지적만큼은 정확하다. 한국경제를 주도해온 삼성이나 현대 등 재벌그룹들이 더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말이다. 기사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삼성이나 현대는 ‘맹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서는 아주 뛰어난 기업들이었다. 반도체나 자동차 등 다른 선진기업들이 만들던 제품을 치밀하게 연구해 더 잘 만드는 전략을 썼고, 그 결과 해당 분야에서 정상급 플레이어가 됐다.

하지만 수많은 기업들이 혁신이 필요한 때 혁신에 뒤쳐져 몰락의 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과거의 영광에 안주했다가 파산의 갈림길에 서게 된 코닥이다. 코닥은 1881년 창업 이래 필름과 사진기술의 대표기업이었지만 파산 보호신청을 하게 됐다. 한 때 미국 필름시장의 90%를 석권했지만 급속한 디지털화로 무너졌다. 문제는 코닥이 이 같은 디지털화의 흐름을 전혀 모른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했고, 1981년 사내 보고서는 디지털카메라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2003년부터는 더는 필름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디지털화에 주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산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미래의 변화를 알면서도 당장의 수익모델이 잘 작동하기에 거기에 집착한 것이 하나다. 새로운 미래 변화에 대응하는 부서의 권한이 약해 실질적 대응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도 이유다. 선마이크로시스템즈가 서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소프트웨어 업체로 전환하지 못해 사라졌고, 애플과 구글 등에 밀려 리서치인모션(RIM)과 야후 등이 같은 처지로 내몰린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삼성이나 현대 등 한국의 재벌기업들도 중요한 고비를 맞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미 글로벌 기업인 삼성도 새로운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같은 사실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대응전략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느냐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대표기업들은 상당히 우려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삼성의 예를 들어보자.

우선, 삼성은 스마트폰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생활감각을 읽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애플의 혁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함께 당한 일이니 그렇다 치자. 그 다음이 문제다. 애플의 아이폰 시리즈 출시가 잇따르자 구글은 자사의 운영체제인 안드로이드 기반 제품을 제조해달라고 맨 먼저 삼성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삼성은 처음에 이 제안을 뿌리쳤다.

그러자 구글은 대만의 휴대폰 제조업체인 HTC에 이를 맡겼고, HTC는 ‘넥서스원’을 출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러자 삼성전자는 뒤늦게 안드로이드 기반 제품 개발에 뛰어들었다. 물론 이 같은 대응은 애플의 혁신에 밀려난 노키아나 RIM, LG전자 등에 비하면 그나마 빠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휴대폰업계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HTC에 비하면 변화에 대한 민감도가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삼성과 HTC의 대응이 왜 다른 것일까. 이는 삼성전자와 HTC의 태생과 연관돼 있다. HTC는 약 15년 전인 1997년 설립 당시에는 신생 중소제조업체에 불과했다. HTC는 처음에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포켓PC를 주문받아 납품하며 성장했다. 그러다가 스마트폰과 PDA, 네비게이션으로 확장했다. 특히 이 회사는 기술혁신 기업으로 유명해 이 회사의 홈페이지를 가보면 ‘최초의 직관적 터치스크린 구현’ 등 최초로 만든 제품이 10여 가지를 넘는다. 이런 식으로 기술 축적을 지속하면서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 제품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른 안드로이드폰 제조사들과 달리 사용자 인터페이스(UI)와 사용자경험(UX)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차별화했다. 삼성전자가 뿌리친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바로 이런 흐름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HTC는 미국시장에서 아이폰을 독점 공급하던 AT&T를 제외한 주요 3사에 모두 스마트폰을 납품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결과 HTC의 시가 총액은 2011년 들어 빠르게 몰락하는 노키아와 RIM을 제치고 40조원에 이를 정도로 쾌속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HTC가 이렇게 고속성장한 비결은 바로 주문생산업체로 쌓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혁신적 제품들을 꾸준히 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소제조업체로서 출발할 때부터 생존을 위해 부단히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기술혁신과 사업모델 혁신을 거듭하는 DNA가 살아있는 것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어떨까. ‘관리의 삼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삼성의 조직 관리 체계는 탄탄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는 이건희회장을 정점으로 하는 오너 지시 및 관리구조라는 측면과도 연관돼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삼성 계열사 사장들은 구조본의 눈치를 보면서 독립적 의사 결정을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 인텔에서 펜티엄4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팀을 이끌었다가 삼성전자에 스카웃된 신용인 박사도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문화, 현업 담당자가 자율권을 갖기 힘든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삼성전자 공장 한 곳을 방문했을 때였다. 담당 임원이 최근 공정 한 부분의 처리 시간을 70% 개선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그런데 부연설명을 들어보니, 얼마 전 윤종용 부회장이 방문했을 때 지적받아서 개선 방식을 찾은 결과라고 했다. 70%씩이나 개선할 정도라면 윤 부회장이 지적하기 훨씬 전에 현장 임원들이 알아서 개선했어야 할 터이다. 지시를 받기 전에는 알아서 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례다.”

신박사의 지적처럼 삼성이 앞으로 ‘지나친 통제로 억눌려 있는 임직원들의 창의성을 북돋우는 문화를 마련하는데 실패한다면, 삼성의 미래 역시 밝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삼성의 대응은 여전히 낡은 틀을 벗지 못하고 있다. 우선, 삼성은 애플 제품들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외형 디자인 및 아이콘 배열방식부터 심지어 아이패트 스마트커버와 거의 비슷한 모습의 갤럭시탭용 스마트케이스까지 ‘베끼기 전략’을 지속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애플과 각국에서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데, 법적 판단이 어떻게 내려지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맹추격자 전략에서 나오는 전형적 대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대응으로는 당장 맞불은 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선도적 기기 사용자들로부터 삼성의 이미지는 아류로 굳혀질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이 같은 소송전을 진행하면서 애플과의 관계가 빠르게 악화하고 있어 애플이 최대 부품 공급업체인 삼성전자 대신 다른 제조사들을 물색하는 흐름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다음 칩 생산 업체를 대만의 TSMC로 옮기려 하고 메모리 또한 일본 도시바에 일부 주문량을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이 차세대 전략사업을 개발하는 방식도 그렇다. 삼성그룹은 내부적으로 이재용 사장이 총괄하는 팀에서 이 같은 개발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새로운 개발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하는데 힘을 실어주는 방식은 좋다. 하지만 모든 직원들이 눈치 보지 않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기업 내 문화생태계를 만들어 줄 때 창의성은 더욱 잘 발휘된다. 일부 유능한 인력을 배치해 아이디어를 짜내도록 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 혁신을 이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삼성전자가 돈을 대는 조그만 여러 개의 신사업팀들을 꾸려 자체적으로 벤처처럼 계속 혁신할 수 있는 구조가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또한 신박사가 인용된 기사에서 주장한 바 있듯이 관리직 코스와 달리 전문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가 코스를 활성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을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이 같은 ‘맹추격 전략’의 문제점은 꼭 삼성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한국의 대다수 기업이 지배구조뿐만 아니라 삼성의 기업 관리 및 운영방식을 모델로 삼고 있는데, 이는 지속적 혁신에 유리한 모델이 아니다. 더구나 재벌 3,4세로 넘어가면서 어려운 사업여건에서 한 걸음 더 내딛으려는 기업가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계열사 품 안에서 안주하려는 자세로 이들 기업들의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 그렇게 해서는 편안하게 푼돈은 벌지 모르지만, 한국의 주력 기업들이 치고 올라오는 중국이나 대만의 업체들에게 밀려날지도 모른다.

‘맹추격 전략’은 국가 전략 측면에서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한국은 크게 보면 왜곡된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1960~1990중반) 에 더해 미국식 모델(1990중반 이후 현재)을 엉터리로 모방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해왔다. 모방하기는 했으되 일본이나 미국 모델의 장단점을 제대로 소화해 국내 현실에 맞게 정착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들 모델을 재벌대기업 등 기득권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방식으로만 모방해온 경우가 적지 않다. 개발연대 시절의 노동 배제적인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외환위기 이후 재기기회(second chance)와 활발한 창업 생태계가 없는 상태에서 막무가내식 정리해고 등을 단행한 것 등이 대표적 예다. 이 때문에 한국은 건전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채 반칙, 부패, 노동억압, 재벌독점, 토건경제, 극단적 빈부격차 등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왔다. 이 같은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으로 야권을 중심으로 (북)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구체적 현실을 고려치 않은 형식적 모방 전략으로 기울지 않을까 우려된다.

예를 들면, 증세 논의가 대표적이다. 만연한 부정부패 구조와 부동산과 주식 등에서 생겨나는 자본이득에 대한 빈약한 과세 등과 같은 현실의 조세재정구조의 문제점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세재정전략을 마련하는 게 순서다. 특히 한국의 경우 증세에 앞서 조세정의를 바로세우는 정세(正稅)와 과도한 토건사업과 재벌지원 등 잘못된 재정지출을 합리화하는 전세(轉稅)의 과제가 더 중요하고 우선적 과제다. 그런데 야권 일부에서는 북유럽의 복지국가 모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며 국내의 조세 및 재정 현실이나 저출산고령화 등 향후 닥칠 사회경제적 도전 과제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복지국가처럼 세금을 걷고 쓰자는 식의 주장을 내놓는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북유럽 복지국가가 참고할 매우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현실 여건을 무시한 채 북유럽국가들이 하는 방식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한국이 복지국가가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은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구가 못지 않게 지하경제 규모가 매우 크고 부패가 만연해 있으며 소득 파악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 특히 부동산 등에서 발생하는 자본 이득에 대한 소득 파악은 거의 안 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북유럽국가들 수준의 소득세를 걷자고 하면 그것은 크게 보면 ‘유리알 지갑’ 인생들의 세금 부담만 일방적으로 더 높아지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또한 복지 전달체계나 공공사업입찰제도 등 재정이 지출되는 ‘수도관’을 고치지 않고 낡은 채로 그대로 두면 재정은 재정대로 탕진하면서도 국민의 삶의 질은 개선되지 않는다. 이런 낡은 수도관을 교체하거나 녹을 벗겨내는 작업들이 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사실 한국의 사회경제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만병통치약과 같은 모델이나 정책은 없다. 더구나 과거처럼 다른 나라의 성장전략을 어설프게 베끼는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북유럽국가들이든 다른 나라의 경험들은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례로서 참고하면 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식해서 거기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초중등 과정의 교육을 칭찬하는 것은 미국 교육 시스템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초중등 과정의 개혁을 위해 사용하는 사례일 뿐이다. (일단,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의 초중등 교육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부족한 것은 논외로 하자.) 이는 고등교육에서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자국의 초중등 교육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미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반대로 한국은 매우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초중등 과정에서 학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뛰어난 편이다. 하지만 고등교육 과정의 경쟁력이 매우 취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국은 교육개혁에서 대학교육의 전문성 및 경쟁력 강화 등이 매우 중요한 과제다. 사실 사생결단식 입시경쟁과 과도한 사교육 등 초중등 교육과정의 문제점도 정작 경쟁무풍지대에 놓여 있는 대학서열체제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대학개혁이 교육개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교육개혁 한 가지를 보더라도 국내의 구체적 현실에 기반한 구체적 해법과 전략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 성공했던 요인이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매우 위험하다. 다시 교육문제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표준화된 대량생산 시대에 어느 정도 통했던 한국의 획일적 입시교육이 앞으로도 통할 것으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미 우리가 느끼고 있듯이 한국의 교육제도는 창의성과 문제해결능력이 중요한 시대에 결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시대 흐름에 맞게 교육제도 또한 바꿔야 한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 흐름에 발맞추는 한편 앞서 지적한 한국경제의 구체적 문제들을 해결할 정책과 제도들을 꾸준히 정착시켜 나갈 때 세계가 부러워할 수 있는 ‘한국식 모델’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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