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찬가

박정희 찬가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함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 가난과 시련의 멍에를 벗고 풍성한 결실과 힘찬 건설의 민주와 부강의 푸른 터전을 이루려는 그 정성을 축복하소서 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 http://www.ilbe.com/1565003156 북한의 남침을 예고 했었던 박정희 대통령 | 자주국방 박정희는 탁월한 군인이었으며 탁월한 군사정보전문가였다. 1953년 이후 그는 더 이상 정보업무를 담당하지 않았지만, 1949년 하반기부터 더욱 심해진 북한과 빨치산의 군사활동은 박정희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김종필을 포함한 육사 8기생 엘리트 장교들과의 만남은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들이 바로 김종필, 이영근, 이병희, 전재덕, 전재구, 석정선, 서정순 등이다. 이 8기생들은 5.16의 기획과 실행을 담당하고, 군정이 시작된 후 정보부 창설하며 제3공화국을 실질적으로 건설한 5.16의 핵심세력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박정희의 리더십이 소규모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력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훗날 이영근은 이렇게 말했다.“작전과 정보에 대해서 경험이 없었던 저희들의 눈에 박정희 그 분은 하나의 경이었습니다. 빨치산들의 이동이 감지되면 그들의 예상경로를 저희 과에서 판단하여 작전국에 알려주곤 했는데 그 분의 예상이 많이 적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우리들에게 그 분은 형님 같기도 하고 아버지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업무에 대해서는 엄격한 분이 술자리에서는 상하 관계를 의식하지 않도록 소탈하게 우리를 대해 주었습니다.”이 외에도 당시 박정희가 전투정보과의 육사 8기생의 신망을 받았다는 증언은 많다. 예를 들어, 가끔 다른 부서의 상관들이 전투정보과 상황실에 나타나 그의 지도하에 8기생들이 그려 넣은 상황판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었다. 박정희는 그들이 상황판을 새로 그려 놓고 나가면, “자아식, 알지도 못하면서” 라고 하면서 상황판을 본래대로 그려 놓았다고 한다.그런데 며칠이 지나고 나면 박정희가 예상했던 판단이 정확히 맞아 떨어져 박정희에 대한 존경심이 배가되었다. 또한 박정희와 8기생들은 무교동에 있던 ‘은월정’이란 술집에 자주 가 우의를 다졌다. 이 당시 정보국장은 장도영이었지만, 장도영보다 나이가 5-6세 많고 실력도 더 있으며 소탈한 성격을 가졌던 박정희가 8기생들의 실질적 리더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박정희는 5.16혁명의 3대 주요 인맥 – 만주군관학교, 조선경비학교 중대장 시절의 생도 5기생, 전투정보과에서 만난 8기생-을 모두 구비하게 된다. 물론 5.16 혁명에는 다른 경로로 합류하게 된 인사들도 많다. 이 외 혁명 동지를 많이 규합한 시기는 54년 10월 부임한 광주 포병학교장 시절과 1군단장이었던 송요찬 아래에서 58년 6월부터 참모장을 지내던 시절이다. 광주 포병학교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 중에는 이낙선, 이원엽, 홍종철, 정인완, 구자춘 등이, 1군 참모장 시절에 알았던 사람들 중에는 박경원, 최택원, 채명신, 김용순 등이 5.16에 참가했다.이 시절 박정희의 활약을 보여주는 문서는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이 보고서는 38선 일대에 걸친 전면적인 남침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실질적인 작성자는 박정희였다. 이 보고서는 원본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재작성되어 <한국전쟁사>에 기록된 것이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준비를 완료하였다. 적의 병력은 전차 1백 50대, 항공기 200여대, 각종 포 2,000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명으로 판단된다.2)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로,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선제 공격할 것이다.3)적은 기습시기는 50년 3월 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공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4)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침투를 병행할 것이다.5)남침을 전후해서 무장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6)적은 위장된 평화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또한 이 보고서는 “제반 정세를 종합하면 오는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 기능을 동원하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38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고 결론지었다.이 보고서는 한국전쟁 초반의 모든 일들을 너무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주지만 관련자들의 증언은 일치하고 있다.박정희는 1975년 6월 25일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 민족사상 가장 처절한 혈투가 전개되었다. …………. 그러나 우리는 남침징후를 약 6개월 전에 예측하였다.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적의 남침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군 수뇌부에 누차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서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군수뇌, 정부당국, 미국고문단 모두가 설마하고 크게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 알고도 기습을 당했으니 천추의 한이 되지 않을 수 없다. …………. 400년 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들이 범한 과오를 우리 시대에 또 되풀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박정희의 예측대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보고서의 정확성은 8기생 내에서 박정희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고, 8기생과 박정희 그룹이 자기 자신들을 심리적으로 군지도부,정부수뇌부,미군지도부와 구분하여 내부결속력을 다지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서울대 논문)          남침예보  박정희가 책상 위에 두고 참고로 하는 책이 딱 한 권 있었다. 일제육군의 교육총감부가 발간한 ‘정황판단’. 이 책은 각종 보고서 양식을 소개하고 지휘관이 작전, 정보, 인사, 군수 등 전문분야를 서로 연계시키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지침서였다. 정보국에 근무할 때 박정희의 머리속에서 체계화된 정보판단과 보고 서 작성 요령은 대통령이 되어 국가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서 소중하 게 활용된다. 1949년10월 이용문 정보국장은 그때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옹진지 구 전투사령관으로 전보되어 나갔다. 이용문은 박정희에게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하여 박정희가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명령이 취소되었다. 후임 정 보국장은 5·16때 박정희와 운명적인 관계에 서게 되는 장도영 대령이었 다. 성품이 선하고 명랑한데 정치적이란 평을 들었던 장 대령은 전임자와 는 대조적이었다. 박정희와는 육군사관학교 간부로 같이 근무할 때 잠시 스친 정도였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으나 아직은 친밀해지기 전이었 다. 장도영은 나이는 박정희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장도영 국장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상황실에 자주 들러 적정을 자주 파악하여야 했던 나는 박정희를 자 주볼 수 있었다. 항상 사복차림으로 의기소침하게 있던 그를 퍽 가엽게 생각하여 때때로 사담도 나누고 때로는 그의 생활에 관한 것도 알아보았 다’. 이 무렵 전투정보과는 유양수 과장의 지도 하에 ‘연말종합적정판단서’ 를 만들고 있었다. 연례적인 보고서였지만 북한의 전쟁준비상황이 감지 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남침 가능성을 검토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1949년 12월17일에 육본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이 판단서의 총론부분은 박정희가 썼다고 한다. 이 판단서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1950년 봄을 계기로 하여 적정의 급진적인 변화가 예기된다. 북괴는 전기능을 동원하 여 전쟁준비를 갖추고 나면 38도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격을 취할 기도를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전투정보과에서 1949년말에 작성한 ‘연말 적정판단서’는 북한이 남침할 때 예상되는 주공과 조공 방향도 거의 정확하게 예상했다. 즉, 의정부-서울을 주공으로 삼고 개성-서울과 화천-춘천-서울남쪽 우회 노선을 조공으로 삼아 남침할 것이며, 주문진과 옹진에서 견제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 했다. 이 판단서는 그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 관련자 들의 기억에 의존할수 밖에 없다. 김종필은 상황실장 역할을 하던 박 정희의 주재하에 북한반의 자신과 남한반의 이영근중위가 중심이되어 이 판단서를 작성했다고 증언했다. 유양수 당시 전투정보과장(육군소 장, 동자부장관 역임)은 이 보고서는 과원들 전체가 참여하여 만든것 이지 누구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할 사안이 아니라고 말했다. 김종필의 기억에 따르면 이 판단서는 남침 시기에 대해서 ‘1950년 3월이 될 것이나 동북한인의용군의 북괴군으로의 편입이 지연될 경우 에는 6월이 될것이다’고 정확히 예언했다는 것이다.그 편입은 1950년 5월에 끝나 남침이 6월로 연기되었다는 주장이다.이 판단서는 또 ‘소 련은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지만 중공은 경우에 따라 직접 지원할 것 이다’고 예측했다. 이 판단서는 국방부, UN한국위원단, 미군사고문단, 우리군의 사 단급 부대에 배포되었다. 전투정보과는 이 판단서를 기초로 하여 군 수뇌부에 대해서 설명회도 자주 가졌다. 군 수뇌부에서는 미군사고문 단측에 대해서 남침위협을 강조하고 군사지원, 특히 대전차무기의 제 공을 여러번 요청했다. 미군측에서는 ‘스탈린이 도발한다면 유럽에서 할 것이다. 전차는 한반도와 같은 산악지대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말 만 되풀이했다.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정부가 북진하지 않을까 우려하 고 있었으니 군사지원을 해줄 리가 없었다. 우리 군수뇌부는 미군의 이런 냉담한 태도에 직면하여 무력증을 느끼고 있는데 일선에서는 계 속해서 ‘남침 임박’이란 정보 보고가 올라오니 답답하기도 하고 짜증 도 났을 것이다. 유양수에 따르면 이런 상층부의 영향을 받았는지 장도영 정보국 장도 그런 정보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자 신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전투정보과 상황실장 박정희는 ‘남침임박’이란 경보를 보내면서 다가오는 전운을 누구보다도 예민하 게 느끼고 있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中)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695216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700950  김종필은 인터뷰에서는 마치 자신이 ‘연말종합적정판단서’ 를 작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과장을 했는데…종필이가 듣보잡(밥풀떼기 하나)일때 1949년 중순 당시 전투정보과는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보고서를 상부에 수시로 올렸었고…1949년 10월 이용문 정보국장이 전방으로 전보직후 유양수과장 지도하에 박정희가 실무를 맡아서 ‘연말종합적정판단서’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시작했음. 훗날 이영근은 이렇게 말했다.“작전과 정보에 대해서 경험이 없었던 저희들의 눈에 박정희 그 분은 하나의 경이었습니다. 빨치산들의 이동이 감지되면 그들의 예상경로를 저희 과에서 판단하여 작전국에 알려주곤 했는데 그 분의 예상이 많이 적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참고로 이영근은 김종필과 육사8기 동기생으로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했었음..물론 김종필도 같은 정보과 근무.)           아 가카